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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umu 작성일18-06-08 16:01 조회1,0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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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빛의 건축가, 루이스 칸  




'침묵과 빛'의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I.Kahn,1901~1974)

1901년 에스토니아라는 나라에서 유태인으로 출생. 
1905년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 이곳에서 펜실바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 디자이너로 일한다. 건축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여러 공동 작업을 완성했으나, 1948년 이후 사망할 때까지 줄곧 혼자 작업하게 된다. 

그는 1947년부터 1957년까지 예일 대학의 건축학 교수이자 건축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이후엔 펜실바니아 대학의 학장을 지낼 정도로 건축학 분야에서 잘 나가던 인물이었다. 그는 1971년 AIA 금메달을 수상하고, 1972년 RIBA 금메달을 수상했으며, 미국 예술학회(American Academy of Arts and Letters) 회원으로 뽑히는 등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작업하던 건축 사무소는 지독한 적자에 허덕였고, 
(그는 건축을 돈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예술 작업처럼 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벗어난 건축 예술가. 항상 손해만 봤다.) 
그의 사생활은 난장판 그 자체였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3집 살림을 동시에 했는데, 각 집마다 아이가 하나씩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아들 나타니엘은 아주 버림 받아, 아들은 유년기 이후 단 한번도 아버지 루이스 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루이스 칸 역시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에겐 공식적으로 본부인에게 낳은 딸 하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974년 3월 인도로 출장갔다가 돌아오던 중 뉴욕의 기차 정거장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73세의 나이였다. 당시 그는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아서 뉴욕의 시체 안치소에서 며칠 동안 방치되었다고 한다.

루이스 칸의 버려진 아들 나타니엘은 아버지의 실체를 찾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아카데미 상에 후보로도 오른다.)
나타니엘은 필름 안에서 어머니에게 우리에게 몹쓸짓을 한 아버지가 아니었냐고 혼자 살아가기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가 그렇게 행동한 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할 뿐. 
그리고 나타니엘은 드디어 아버지의 마지막 "유작"인 방글라데시 국회 의사당을 만난다. 이곳에서 루이스 칸은 수익성 없는 가난한 나라의 프로젝트를 맡아 혼심의 힘을 기울여 왔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방글라데시 인들과 함께 허허벌판 위에 위대한 자신의 마지막 역작을 남겼고, 
그는 방글라데시의 땅 위에, 방글라데시 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게 된다. 

방글라데시 국회 의사당. 
루이스 칸의 필생의 역작이다. 
루이스 칸이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다음으로 설명될 수 있을 듯 하다. 칸 이전의 건축이 형태를 결정하는 요인을 기능에 두었다면, 칸 이후의 건축물의 형태는 인간의 기본 욕구에 따르도록 설계되었다. 현대에 들어서 설계되고 만들어진 건축물이 기능성, 디자인 (그리고 최근에는 건강)등등의 복합적인 요소가 들어가는 그 모든 이유가 인간의 욕구에 충실하다는 것을 보면 칸의 영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듯 하다.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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